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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쓰는 일기

첫 진료

homeless 2020. 11. 28. 21:48

우리 동네에는 정신건강의학과 병원이 딱 한 군데뿐이다.

다행히 나는 이 병원에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

 

사실 7년 전에, 직장 스트레스와 펫로스 증후군이 겹쳐 우울증을 앓았다.

그 당시 애인, 현재 전 남편의 직장이 있던 이 동네에서 진료를 받고, 잠깐 그의 일터에 들러 얼굴만 보고 갔던 기억이 있다. 상담실에서 눈물이 터진 나에게 병원 원장님이 건넨 말씀이 너무 힘이 되었던 터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여기까지 자기 의지로 찾아온 것만 해도 훌륭해요. 정말 어려운 건데, 잘했어요."

꾸준히 치료를 받기엔 거리가 멀어서, 원장님은 진료소견서와 함께 내 직장 근처 대학병원을 추천해주셨고 덕분에 잘 회복하여 7년을 지냈다.

 

기록이 남아있어, 진료실에 들어가니 원장 선생님께서 반갑게 아는 체를 하신다.

 

 

선생님 : 7년쯤 전에 저희 병원 내원하셨네요. 당시 회사 다니고 있다고 하셨고.... 집이 멀어서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는 걸로 돼있는데, 지금은 어디 살고 계신가요?

 

나 : 지금은 직장은 안 다니고요. 근처 OOO에 살고 있어요.

 

선생님 : 아하 혹시 결혼하셔서 여기로 이사 오신 건가요?

 

나 : 아 네.. 그게 그렇긴 한데.. 제가 지금 이혼을 준비 중이거든요.

 

 

7년 전과 마찬가지로 또 눈물이 터졌고, 눈물 콧물을 휴지로 닦으며 상담이 진행되었다. 이혼을 하는 이유와, 남편의 행동과, 내 생각과, 현실적으로 얽힌 돈 문제 등등.... 

 

 

선생님 : 남편분이 관계에 대해 아주 쿨하게, 나는 언제든 관둬도 상관없다 라는 식이네요. 그런 것이 ㅁㅁ씨에게 상처가 될 거구요. ㅁㅁ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나 : 변하지 않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는 제가 참아왔지만 살면서 언젠가 한 번은 못 참는 날이 올 거고, 제가 놓아버리면 헤어지겠죠. 어차피 시간문제라면 빨리 헤어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선생님 : 남편분이 짐을 싸고, 따로 집을 구해서 나가겠다고 하는 건 그냥 그렇게 하도록 둬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ㅁㅁ씨가 남편분한테서 받아야 될 돈은, 차용증이라거나 서류상 필요한 조치를 다 해두되, 그 돈을 실제로 받는 행위는 시작을 조금 늦췄으면 좋겠어요. 두세 달 정도요. 

 

나 : 왜 그래야 하나요?

 

선생님 : 시간을 좀 갖는 거죠. ㅁㅁ씨가 말씀하신 대로,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을 확률이 높긴 해요. 그런데, 감정이 우울할 때 무언가를 너무 끝까지 다 결정해버리는 것은 추천하지 않아요. 또 두 분이 함께한 기간이 길잖아요. ㅁㅁ씨의 마음을 위해서라도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나중에 후회가 없어요. 지금 빨리 다 결론내고 정리해버리고 싶나요?

 

나 :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말씀하신대로 할게요.

 

 

그리고 약 처방을 위해 지금 몸과 마음 상태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나 : 자살에 대해서 생각해요. 다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

 

 

"실제로 시도한 적이 있나요?"라고 묻는 선생님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나를 비난, 판단하는 조로 들리지 않게. 진지하지만 엄격하지는 않도록 다듬어진 그 목소리에서 어떤 배려를 느꼈다.

 

 

나 : 아니요. 실제로 시도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고통스럽지 않고, 실패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자꾸 찾아보게 돼요.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부끄러울 일도 아니다. 도움이 필요해 내 발로 찾아온 곳에서 점잔을 빼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약 복용이 필요한 상황인데 괜찮은지 선생님은 물으셨다. 나는 지난 경험으로, 이 약의 힘을 알고 있다. 어차피 내 마음 많이 아프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약의 도움으로 나는 힘든 시간을 비교적 덤덤하게, 이성을 가지고, 실제 필요한 일상적 일들을 해내며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충분히 애도하고, 시간이 흐르면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하고 치료가 끝날 날이 올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어떤 편견도, 걱정도 없다. 마치 마법사의 물약을 얻은 기분으로, 3일 치의 약을 받아 들고 병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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